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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2019)는 DC 코믹스의 대표적 악당 조커의 탄생을 다룬 영화이지만, 전통적인 슈퍼히어로 영화의 공식에서 벗어나 심리 스릴러, 사회 드라마, 비극적 인간극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강화한 작품이다. 주인공 아서 플렉은 고담시의 소외된 계층이자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인물로, 그의 일상은 단절과 외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영화는 아서가 조커로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의 실체와, 그 이면에 존재하는 무관심과 책임 회피의 구조를 강렬하게 비판한다.
1. 사회적 고립 – 무너진 관계 속에서 태어난 괴물
아서 플렉은 고담시에서 간신히 살아가는 코미디언 지망생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이미 시작부터 붕괴 직전이다. 그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으며, 정부로부터 받는 치료와 약물 지원도 예산 삭감으로 끊겨버린 상태다. 가난한 어머니를 돌보며 하루하루 버텨가는 삶, 그 속에서 그는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어간다. 사회적 고립은 영화 속 가장 핵심적인 테마다. 아서에게는 친구도, 연인도, 진정한 가족도 없다. 거리에서 웃음 치료사로 일하던 그가 청소년들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쉽게 '희생자'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사회는 그의 고통에 반응하지 않는다. 그를 조롱하고, 무시하며, 투명인간처럼 대한다. 그의 내면은 점점 메말라가며, 삶에 대한 희망은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는 웃고 싶지만, 웃을 수 없고, 사랑받고 싶지만, 사랑받지 못하며, 인정받고 싶지만, 비웃음만 받는다. 이러한 연쇄적인 사회적 단절은 그가 '인간'으로 기능하는 구조를 무너뜨리고, 결국 ‘괴물’이라는 상징적 존재로의 변화를 촉발시킨다. 이 영화는 고립의 결과가 단지 외로움이 아니라, 폭력과 파괴로 이어질 수 있음을 정면으로 드러낸다. 아서가 지하철에서 처음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은 단지 범죄 행위가 아니라, 그가 처음으로 '세상이 나를 본다'고 느낀 순간이다. 그는 비로소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 즉, 《조커》는 사회적 고립이 어떻게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그 비극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결핍의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아서가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 모습은 단지 조커라는 캐릭터의 기원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약자들이 겪는 실존적 고통의 은유다.
2. 조커 정체성과 광기 – 가면을 쓴 존재의 탄생
《조커》에서 아서 플렉은 현실 속 ‘자신’과, 내면의 이상적 자아인 ‘조커’ 사이에서 점점 균열을 일으킨다. 이 영화는 악당의 탄생 과정보다도, 그가 어떤 과정을 통해 정체성과 감정의 이중성을 겪게 되는지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처음의 아서는 여전히 선한 의지를 가진 인물이다. 그는 타인을 해치기보다, 인정받고 싶어 하며, 가족과 행복한 관계를 꿈꾼다. 그러나 세상이 그를 매번 짓밟을수록, 그의 내면은 조금씩 ‘조커’라는 또 다른 자아로 물들기 시작한다. 조커라는 이름, 그리고 광대 분장은 그가 만들어낸 보호막이자, 새로운 정체성이다. 이 가면을 썼을 때만이 그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당당할 수 있으며, 세상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이 가면은 단지 외형의 변화가 아니라, 그의 정체성 자체를 재편하는 강력한 장치다. 우리는 종종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할과 기대에 맞춰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숨긴다. 아서 역시 웃음 장애와 정신질환을 가진 자신을 부정하려 애썼지만, 결국 사회가 강제한 고통을 통해 그는 진짜 ‘나’로서의 얼굴을 ‘광기’라는 형태로 세상에 드러낸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정체성과 광기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파고든다. 과연 그는 정말 미친 사람인가? 아니면, 세상에서 미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가? 이 질문은 관객 각자에게 돌아가는 화두이며, 조커는 그저 악당이 아니라 우리 안에 존재할 수 있는 ‘파편화된 자아’의 상징으로 읽힌다.
3. 현대 사회의 책임 – 누가 조커를 만들었는가
《조커》는 개인의 광기를 단죄하기보다는, 그 광기를 낳은 사회적 환경에 더 큰 책임을 묻는다. 아서가 조커가 되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를 외면한 복지 제도, 조롱만 일삼는 방송 매체, 그리고 무책임한 정치 권력은 모두 하나의 공범처럼 기능한다. 이 영화는 단지 정신질환자의 범죄가 아니라, 정상이라는 이름 아래 묵인된 사회적 폭력의 누적을 고발한다. 아서가 약을 끊게 된 건 그가 원해서가 아니라, 시가 예산을 삭감했기 때문이다. 그가 정신 상담을 받지 못한 건 게을러서가 아니라, 시스템이 그를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그의 유일한 소망은 코미디언이 되어 사람들을 웃기고,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회는 그런 ‘이상’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웃는 얼굴 뒤에 있는 고통을 무시하고, 조롱하며, 가짜 환상으로만 소비했다. 결국 아서가 조커가 되었을 때, 그의 광기는 폭력과 파괴가 되었지만, 그 이전에 그는 단지 ‘보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를 악당이라 부르기 전에 과연 우리가 그를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했던 적이 있었는가를 되묻게 된다. 이 영화는 사회적 분노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무관심과 방치, 차별과 배제의 결과라는 점을 강조하며, ‘조커’라는 이름이 단지 영화 속 악당이 아니라 현대 사회가 언제든 만들어낼 수 있는 산물임을 경고한다.
《조커》는 단지 한 인물이 악당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작품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누군가의 고통을 얼마나 외면하고 있는가?” “웃음을 가장한 광기 뒤에 숨은 절규를 들으려 한 적이 있었는가?” 아서 플렉은 조커가 되었지만, 그 변화는 단지 그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는 우리 사회의 무관심, 냉소, 단절이 빚어낸 ‘집단의 초상’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진짜 괴물이 누구인지, 정말로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된다.《조커》는 웃음을 잃어버린 사회에서 광대의 분장을 한 한 남자가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외치게 되었는지에 대한 씁쓸한 기록이자 거울이다.